양평의병 인물

1895 양평의병기념사업회

김백선 의병장

1849~1896 

우하 안기영 의병

1884~1920

하사 안병우 의병장

1866~1896

금파 이승룡 의병

1853~1896

송석 이연년 의병

1874~1944

후기의병 인물

의병장(義兵將) 이연년(李延秊) 

의병장(義兵將) 이연년(李延秊) 
공(公)의 초명(初名)은 목년(穆秊)이고 호적명(戶籍名)은 득년(得秊)이며, 자는 경문(敬文), 호는 송석(松石), 본관은 청해이다. 1874년 갑술(甲戌) 12월 9일 양평읍 대흥리에서 강령현감 겸 해주진관병마절제도위(康翎縣監 兼 海州鎭管兵馬節制都尉) 이승룡(李承龍)의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였다. 공(公)은 시조(始祖) 이지난(李之蘭)의 16대손인데,조(祖)의 휘는 은석(殷錫), 증조의 휘(諱)는 명규(命逵), 고조의 諱는 경약(慶若)이다.
  공(公)은 남천무과(南薦武科)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公은 을미년에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거의하였던 부친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순국하자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1905년 일본의 창괴를 앞세워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국왕 이하 전 민족이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公은 부사과(副司果)를 사임하고 대흥리 본가로 귀향하여 34세에 의병을 일으켰다. 公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의병을 규합하여, 양근 앞 남한강변에 의병을 매복시키고 또는 창말 근방 길목에 매복하여 양수리에 주둔한 수비대가 오는 것을 일시에 공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적의 응원을 염려하여 용문산 방향으로 후퇴하였다. 또 적이 용문산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탐지하여 속칭 비고개산에 매복하였다가 고개로 오는 적을 습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용문산 깊숙이 이동하였다. 그러자 적은 용문산에 들어와 용문사를 불태웠다.
  한편 여주에 일본군이 집결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항하여 의병도 여주방면에 집결되었는데, 公은 의병의 병기와 훈련미숙으로 정면대결보다는 유격전을 주장하였다. 지평 양동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公은 사격을 가하면서 후방으로 퇴각하였다. 여기서 일군은 여주방면으로 후퇴하였지만 의병의 희생은 컸다. 공의 병력은 홍천 횡성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병을 가평으로 집결하라는 격문을 받고 가평 화악산 기슭에 유진하여 설빙혹한에 적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公은 사격을 계속하였는데 총열이 달아서 총알이 앞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양측의 피해가 막심하였는데, 公은 복부에 냉해를 받아 배알이로 고생을 하였다. 
  1908년 홍천 횡성 지방에서 왜적과 10여 차례 격전 끝에 많은 병력의 손실을 보고 잔여 병력 100여명을 이끌고 유격전을 계속하다가 청운면 삼성리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지평 감옥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7일 만에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옥중생활 8개월에 다시 완도의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公이 유배 중에 있는데 밤중에 찾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을 보고 의병장이냐고 묻고는 그렇다니까 우리는 의병이니 함께 가자며 자기들의 지도자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의병 수가 적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몇 사람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이 가난하고 애국심이 부족하여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귀국하여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서 5년간 머무르며 이극성(李克性)․이무성(李武性)등의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공은 여주 대신면 가남리 대절(竹寺)마을로 이주하여 이희두(李喜斗), 김창덕(金昌德), 문선출(文善出) 등의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公은 여기서 형집행 시효가 지나서야 다시 과천 문원리로 이주하여 4년이 지난 후에 양평 대흥리 본가로 돌아와 대곡서당(大谷書堂)을 열어 타계(他界)할 때까지 10여년간 청소년을 훈학하며 항일구구사상을 고취시켰다. 대흥리 이희원(李喜元), 이향성(李香性), 이광우(李廣雨), 김영렬(金英烈), 이병관(李秉寬), 고대성(高大成)(생존) 등은 公에게서 수학(受學)한 사람들이다.

  公은 1944년 4월 1일 조국광복을 못 본 채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묘소(墓所)는 용문면 삼성리 백고개 봉화뚝 해좌(亥坐)에 안장하였다. 4남 중신(重臣)이 비문을 지어 1987년에 보훈처의 지원으로 묘비를 세우고 상

의병장(義兵將) 이승룡(李承龍)

의병장(義兵將) 이승룡(李承龍)
公의 자는 수운(秀雲), 호는 금파(錦坡), 본관(本貫)은 청해(靑海)이니, 청해백 양렬공 이지란(靑海伯 襄烈公 李之蘭)의 15대손이다. 공은 1853년 계축(癸丑) 정월(正月)17일에 양근군 동종면 대곡동(양평읍 대흥리)에서 부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겸오기장 은석(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 殷錫)과 모친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6형제(兄弟) 중 4남으로 출생하였다.
  公의 고조는 증통훈대부 사복시정인데 휘(諱)는 광(桄),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인데 휘(諱)는 경약(慶若), 조부는 증가선대부 병조참판인데 (諱)는 명규(命逵)이니, 3대의 증직은 은석의 관직에 의한 것이다. 충효를 가훈으로 하는 전통의 가문에서 태어난 公은 어려서부터 영달(英達)하고 명민(明敏)하며 강개(慷慨)한 기절(氣節)이 있었다. 그리하여 公은 독서를 좋아하여 10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다. 또한 무서(武書)도 익히고 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장차 유망한 인물로 평가 받았다. 
  1866년 14세 때 병인양요시(丙寅洋擾時)에는 나라가 위태로움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나가서 싸워야 한다며 벽에다 ‘의병장 이승룡’이라 써서 붙이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친척 중에 혜랑벼슬을 하는 이승목(李承穆)에게 찾아가서 “양병침입을 보고 백성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가 싸우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이승목(李承穆)은 대원군에게 이승룡의 기특함을 이야기 하였다. 대원군은 “너 아니라도 능히 양적을 물리칠터이니, 너는 고향으로 내려가 학업을 열심히 닦고 군자의 도를 닦아 장차 훌륭한 일꾼이 되라”고 하여 그대로 내려왔다.
  1877년 25세에는 친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하러 가는데 신변보호를 위하여 수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감한 뜻으로 타고 가라는 당나귀 한필과 아버님께 드리라며 옷감 안동포 1필을 선사하여 당나귀에 싣고 문경새재를 넘어오는 도중 굼주려 쓰러진 한 가족 4명을 보고는 팔아서 쓰라며 당나귀를 그들에게 주고 걸어서 왔다.
  그해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직에 임명되어 다음 해에 부호군(副護軍)에 승진 되었다. 1881년 29세에 충북장(忠北將)에 임명되어 다음 해 6월 9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민겸호가 살해되자 그 시신을 거두어 아들인 민영환의 집으로 호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영환과는 교분이 두터운 관계였다.
  1885년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고향인 대곡동으로 내려와 3년 거상에 임하였다. 1887년 35세에 중추원 첨지를 거쳐 38세에 통정대부 강령현감  해주진관병마절제도위 (康翎縣監 海州鎭管兵馬節制都尉)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강령에는 탐관오리의 착취로 민요(民擾)가 발생하였는데, 민영환이 公의 덕망과 지략을 잘 알고 고종에게 추천하여 임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公이 부임을 사양하였다. 고종이 어전으로 公을 불러 사양 이유를 물은 즉, 公이 대답하기를 “황공하오나 백성들이 생활고가 막심한데다가 탐관오리의 착취와 헌납금 과징으로 민요가 일어났으니 동촉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고종은 즉석에서 헌납금 탕감을 윤허하시고 속히 부임하여 위민정치를 하라고 하였다. 公은 강령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안유시키고 관속들의 민폐와 잡부금을 없애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890년 39세에 정월(正月) 이웃 고을 연안부(延安府)에 민요가 발생하자 황해감사 오준영(吳俊泳)이 나라에 장계를 올려 公을 민요수습 명사관(民擾收拾 明査官)으로 임명하였다. 公은 5개군 수령과 난민의 대표를 불러 시시비비를 상세히 조사하여 중립적 위치에서 사리를 판단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여 민요(民擾)를 수습하였다.
  1892년 40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3년 거상을 다하고 상경하였다. 이때는 1894년으로 전국에는 동학란(東學亂)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청일양국군(靑日兩國軍)이 주둔하여 세상의 인심이 혼란하였다. 결국 6월에 청일 양군이 충돌하여 일본이 승리하고, 이를 등진 개화세력에 의해 변화가 무쌍하여 주권은 일본인과 그 주구들에 의

의병장(義兵將) 김춘수(金春洙)

의병장(義兵將) 김춘수(金春洙)
공(公)의 자(字)는 춘수(春洙)이며, 일명 병수(丙洙)인데, 본관은 광산(光山)이니, 흥광(興光)의 38세손이다. 
  1874년 갑술(甲戌) 8월 13일 옥천면 신복3리 292번지 복곡(福谷)에서 아버지 영석(永錫)과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와의 사이에서 장남(長男)으로 태어났다.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에게서 유래한다. 흥광(興光)은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에 피신 은둔하며 살았는데, 대대로 그곳을 관향으로 삼은 것이다.
  公은 14대조 공안공 휘 겸광(恭安公 諱 謙光 1419~1490)은 순성명량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純誠明亮佐理功臣 正憲大夫 議政府 左參贊)을 역임하고 광성군(光城君)에 피봉 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公의 고조 휘(諱)는 기엽(箕燁), 증조의 휘(諱)는 재정(在貞), 조부의 휘(諱)는 옥현(玉鉉)이다. 公은 이도사라는 분에게 공부하였는데, 성품이 과묵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호걸의 기상으로 자못 큰일을 할 인물로 기대되었다.
  민비시해와 단발령, 을사늑약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 역당들과 일제의 만행이 계속되자 公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한 때는 개풍군수의 임명도 개화벼슬이라 사양하고 의리를 지켜 의병을 일으켰다.
  公은 1907년 1월 이인영(李麟榮)이 서울을 공략하기 위한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편제 할 때에는 안무장(安撫將)에 임명되고, 7월에 고종의 강제퇴위 사건, 정미 7조약,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재기할 때에는 34세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公은 의병 800명을 모집하여 중군장에 한창리(韓昌履), 참모에 맹일호(孟日鎬)를 임명하고 홍천 보리울(牟谷), 여주 칠읍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때에 군량미는 원덕리 천석군으로 이름난 이성연(李成淵 1886~1954)이 조달하였다. 한창리(韓昌履 1858~19
18)는 자(字)가 성문(性文)인데, 같은 마을 용직(用直)의 아들이며 맹일호(孟日鎬)는 公의 대고모부인 지평현감 맹영재(孟英在)의 아들이다.
  7월에 진병산에서 패한 춘천의병장 류홍석(柳弘錫)의 잔여 병력을 인수 받아 항전하였고, 동년 8월에는 이성원(李成元), 김성관(金成寬) 등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양주군 광릉천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서울에서 귀향하는 임응서(林應西)를 포섭하여 양근․포천․가평․지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0월 초 1일에는 여주군 천양(川陽)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30명을 죽이고, 또 22일과 11월 15일경에는 홍천군 남창(南蒼)에서 일본군과 교전할 때 동갑(同甲)인 양평읍 대흥리 이연년(李延秊)을 종사(從事)로 임명하였다. 
  公은 군진(軍陣)을 강상면 세월리 가제울, 여주 칠읍산, 옥천 남산에 포진시키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일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였으나 일군에 역부족이었다. 公은 가평 남이섬에서 왜적의 칼을 맞고 쓰러져 체포되어 춘천 감옥에 구금되었다. 원래 힘이 장사인 公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을 하고 밤중에 죽을 힘을 다하여 수갑을 끊고 버선발에 채워진 쇠줄을 빼내고 감시병을 때려 기절시킨 후 담을 뛰어 넘어 탈출하였다. 그러자 일경이 추격하였다. 公은 논두렁에 숨어 있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어느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만주로 갔다. 그러나 만주에도 마적들이 한인을 괴롭혔기 때문에 다시 귀국하여 금강산 밑 회양(淮陽)으로 와서 9년간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公이 탈출하자 고향인 옥천면 신복리 집에는 일경(日警)이 수시로 찾아와 공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부인과 그 가족을 괴롭혔다. 그 괴롭힘에 견디다 못한 公은 가족을 이끌고 여주군 개군면(介軍面) 공세리(貢稅里)로 이주하였다가 가평군 설악면 유명산하 깊숙한 산 골자기인 설곡리 중말 688번지로 이주하였다. 公은 여기서 문맹퇴치를 위하여 허술한 초가집에 일명 중말학교를 개설하고 한문(漢文)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왕뱅이의 이명노(李明魯), 이응노(李應魯), 이석재(李錫載), 용수골의 손천복(孫千福), 소설부락의 김순봉(金順奉), 박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