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의병 유적지

1) 을미의병 기념비(乙未義兵紀念碑)

󰁋명칭 : 을미의병 기념비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383-1
󰁋 건립년대 : 1995년 월 일
󰁋 종 류 : 기념비
󰁋 건립주체 : 양평문화원
을미의병 기념비는 지평리 선정비군의 정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기념비의 전면에는 ‘乙未義兵紀念碑’라 새겼다. 이 비는 양평문화원에서 1996년에 건립한 것이다. 양평지역은 일찍이 華西 李恒老 선생이 도학을 강론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하여 많은 충효도학절의 인물들이 배출되었던 곳이다. 이곳 지평도 그 주요한 지역으로 전국적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던 1895년 11월에 퇴앙(退央) 안종응(安鍾應)과 하사(下沙), 괴은(槐隱), 김사정(金思鼎), 김룡준(金龍俊) 등이 모의하여 김백선(金百先)을 설득하고 고을 사람들을 의리로 깨우쳐서 수일만에 400여명을 모집하였다. 지평에서 거의한 의병들은 밤새도록 군사와 병기를 원주 안창리로 집결시켜 다음날 창의호국(倡義護國)의 깃발을 높이 드니 전국 의병 중 최초의 의병 발상지이다.

󰁋 碑銘(비명)

忠孝絶義(충효절의)는 國泰民安(국태민안)하는 民生(민생)의 基本倫理(기본윤리)이다. 우리 楊平(양평)은 國東近郊(국동근교)로 山紫水明(산자수명)하여 예로부터 士大夫(사대부)가 많이 살아 忠孝絶義(충효절의)를 숭상하는 기풍이 국가의 元氣(원기)가 되어 왔다. 

朝鮮末期(조선말기)에 儒林宗師(유림종사)인 華西(화서) 李恒老先生(이항노선생)이 벽계에서 道學을 講論하고 衛正斥邪(위정척사)를 주창하여 忠孝道學節義(충효도학절의)의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豊川(풍천)梁柱石(양주석) 東雩(동우) 張會鎭(장회진) 荷居(하거) 梁憲洙(양헌수) 重庵(중암) 金平黙(김평묵) 雲菴(운암) 朴文一(박문일) 省齋(성재) 柳重敎(유중교) 勉菴(면암) 崔益鉉(최익현) 錦溪(금계) 李根元(이근원) 毅菴(의암) 柳麟錫(유인석) 勵志(려지) 洪在鶴(홍재학) 華南(화남) 朴長浩(박장호) 諸賢(제현)이 그러한 분들이다. 華西先生歿後(화서선생몰후) 八年(8년)에 倭賊(왜적)은 豺狼(시랑)과 같은 야만성을 들어내어 고의로운 양호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倂呑(병탄)을 목적으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짐홍집 정병하 등 奸賊(간적)을 사주하여 內政(내정)을 간섭하더니 마침내 國母(국모)를 弑害(시해)하고 君父(군부)를 협박하여 욕보이는 등 天人共怒(천인공노)할 만행을 계속하였다. 朝廷(조정)에는 賊黨(적당)이 들끓어 나라는 망한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亂臣賊子(난신적자)를 누구나 벨 수 있는 것은 春秋(춘추)의 筆法(필법)이요 먼저 賊(적)을 치고 뒤에 告(고)하는 것은 後賢(후현)들의 達權(달권)이다. 이에 柳麟錫(유인석) 先生(선생)이 제천 장담에서 文人士友(문인사우)들과 處變(처변)의 도리를 論議(논의) 하였는데 夏史(하사) 安承禹(안승우) 槐隱(괴은) 李春永(이춘영) 두 義士(의사)는 擧義掃淸(거의소청)을 주장하였다. 

이때에 槍(창)을 준비하고 賊黨(적당)이 오기를 기다리던 退央(퇴앙) 安鐘應(안종응)과 夏史(하사) 槐隱(괴은) 金思鼎(김사정) 金龍俊(김용준)의사가 謀議(모의)하여 槐隱(괴은)이 金伯善(김백선)을 설득하고 고을 사람을 義理(의리)로 깨우쳐서 수일만에 義兵(의병) 四百(4백)여명을 모집하였다 드디어 단기4228년 乙未(을미) 11월 27일 지평에서 擧義(거의)하여 밤새도록 군사와 병기를 원주 안창으로 집결시켜 다음날 倡義護國(창의호국)의 깃발을 높이드니 전국의병중에서 가장 우뚝하였다. 夏史(하사)는 順興人(순흥인)이니 丙子節臣(병자절신) 安光郁(안관욱)의 九代孫(9대손)이며 父(부)는 鍾應(종응)이요 槐隱(괴은)은 德水人(덕수인)이니 澤堂(택당) 李植(이식) 先生(선생)의 九代孫(9대손)이며 父(부)는 敏和(민화)이다. 두의사는 楊東(양동)에 世居(세거)하였는데 호걸의 기상으로 장대한 뜻을 품었다. 省齋(성재) 義菴(의암) 두문하에서 衛正斥邪(위정척사위)의 義理(의리)를 배워 捨生取義(사생취의)하고 殺身成仁(살신성인)하였으니 참으로 지평의병의 두주역이다. 金伯善(김백선)도 지평사람인데 의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383-1

2) 을미의병(乙未義兵) 추모비(追慕碑)

󰁋명칭: 을미의병 추모비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 74번지 의병묘역
󰁋 건립연대 : 
󰁋 건립주체 : 양동을미의병 성역화 추진위원회
󰁋 지정사항 :

󰁋 비문내용

양동면 석곡리 의병묘역 내에 위치한다. 1895년 양동면(당시 상동면) 출신의 의병장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이 이곳에서 출병한 것을 기념하여 1997년 ‘문화유산의 해’에 세운 추모비다. 2단의 화강암 비좌와 검은색 대리석 비신, 두 마리 용을 양각한 옥개석을 갖춘 비로 전면에 ‘을미의병(乙未義兵) 추모비(追慕碑)’라 음각하고 후면과 측면에서 당시 의병의 조직계보를 새겼다. 추모비의 좌측에는 건립비문이 세워져 있다.

󰁋 관리 

양동면에서 관리하며 매년 10월 28일 양평군 기관사회단체장들과 (양동중고등학생들의 의병행렬) 지역민, 의병유가족 등 300여명이 참석하여 무명의병 선열들과 의병장들을 위한 추모제를 올린다. 추모제 비용은 매년 양동면에서 300만원씩 지원한다.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74

3) 지평을미의병 발원지 표석

󰁋명칭 : 국맥지평 발원지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지평면사무소 앞
󰁋 건립연대 : 2012년 6월 1일
󰁋 건립주체 : 지평의병정신 선양회

󰁋 비문내용 

1985년(乙未年) 8월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같은 해 11월 공포된 단발령에 항거하여 곡수에서 살고 있던 괴은 이춘영은 당시 지평현(군) 상동면(양동) 퇴양 안종웅과 의병 거의를 상의 하였고, 지평현 장둔면(청운) 김백선 장군은 지평관아에 의병거의를 청하였으나 지평관아에서는 의병 거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춘영 장군과 김백선 장군은 지평 포군 400여명을 모집 창의하여 원주 안창으로 이동한 후 을미년 11원 28일! ⌜지평 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지평 금리(월산리) 금계 이근원 선생(화서 이항로 선생의 후학)은 문파의 전략을 지원하였고 그에게서 학업을 닦은 안승우 장군(안종웅의 아들)등 후학과 평민들이 합류하여 의병의 수가 1천여 명에 달했으니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원주관아 점령에 이어 제천, 충주, 단양 등지에서 크게 승리 하였고 인근지역 의병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후일 ⌜지평의병⌟ 은 17세의 지평 소년의병 손용문(손덕희 의병의 아들)과 금계 선생의 후학인 천낙귀 등 평민들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니...

지평! 지평! 국맥 ⌜지평의병⌟ 이여!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항쟁했던 선열들의 호국정신을 후세 만대에 기리고자 한다. 
2012년 6월 1일

양 평 군
지평의병 정신선양회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4) 양동을미의병 발상지 표석

󰁋 명칭 : 을미의병 발상지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평의병묘역 입구
󰁋 건립년대 : 2012년 10월 28일
󰁋 건립주체 : 양동을미의병성역화 추진위원회, 양평문화원 양동분원

󰁋 비문내용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양평의병묘역 아래 사이실 집터(301평)는 퇴앙 안종응, 하사 안승우, 우하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양동은 당시 지평현 상동면이었음으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한국을 병탄하려고 국권을 농락하더니, 마침내 1895년(乙未年) 우리나라의 중전 민 왕후를 학살하고 단발령을 강제로 실시하는 등 우리조국과 민족을 강점하여 식민지화하려는 야만성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한 퇴앙이 동지들과 거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사의 친우인 목곡 출신 괴은 이춘영 의사가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찿아와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괴응은 청운면으로 가 김백선 의사를 만나 거의하기로 하고 의병 400여명을 모집하여 원주 안창으로 집결시켰다. 퇴앙은 제천에 있는 하사에게 명하기를, 의암 유인석 선생에게 의병참여와 계책을 문의하여 안창으로 오라고 하였다. 하사가 명을 수행하여 일행과 함께 안창 만수암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이춘영 김백선 김사정 여러의사와 창의호국투쟁을 결의하고 음력 11월 28일 안창역에서 장수 이괴은이 단상에 올라 깃발을 높이드니, 전국에서 가장 먼저였다. 의병진은 원주를 점령하고 제천으로 진격하여 류인석 선생을 대장에 추대하였다. 류 대장은 의병진을 재편하고 장기항전에 들어가 연합의진으로 발전하여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류대장은 재기를 꿈꾸며 압록강을 건너갔으나 1896년 음력 7월 31일 회인현 사첨자 파저 강변에서 창의 8개월 만에 무장해제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이상으로 보면 양동면 석곡리 355번지 집터는 화서학파가 위정척사사상을 기반으로 창의호국투쟁을 논의한 곳이다. 이는 항국근대항일민족운동 50년 역사의 시발점이라는데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평군 양동면은 명실상부한 1895년 을미의병 [지평의병]의 발상지였다.

단기4345년(서기2012년) 임진 7월 15일

지은이 : 독립기념관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김 호일

경기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철학박사 장 삼현

󰁋 관리 : 양동면

의병장(義兵將) 이춘영(李春永) 묘비(墓碑)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 97-2
󰁋 종류 : 묘, 묘비
󰁋 건립연대 : 
󰁋 건립자 :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18호

󰁋내용

양동역에서 328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350m정도가면 우측으로 철길굴다리를 통과하여 다시 북쪽으로 400m정도 가면 석곡1리 목골로 가는 도로가 있다 . 이 도로는 다시 윗목골과 아랫목골로 가는길로 나뉘는데, 오른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아랫목골이 나온다. 의병장 이춘영의 묘는 이 마을의 북동쪽에 있는 야산의 끝자락에 조성되어 있다.

이춘영(李春永, 1869~1896)은 조선 말기의 의병장으로 자는 우삼(友參), 호는 괴은(槐隱)이고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동향인(同鄕人) 안승우(安承禹)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지평감역(砥平監役)으로 있던 맹영재(孟英在)를 포섭하여 거의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자, 포군(砲軍) 김백선(金百先)을 설득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400여명의 관군을 포섭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원주(原州), 단양(丹陽), 청풍(淸風), 충주(忠州)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명성을 떨졌다. 이후 풍기(豊基)로 진군하다가 친척인 이민옥(李敏玉)의 배신으로 관군의 기습을 받고 패전하였다. 그 뒤 부대를 수습해 충주로 이동하여 유인석(柳麟錫)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활동하였다. 조령(鳥嶺), 달천(達)川), 안보(安保) 등지에서 관군과 일본군 탐관오리들을 격파하였으나 1896년 충주싸움에서 28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남서쪽을 향해 있으며, 중앙에는 상석이 있고 상석 오른쪽에 묘비가 있다. 묘비(높이 117cm, 폭 41cm, 두께 17cm)는 1970년에 건립된 것으로 재료는 대리석이며, 전면에는 한글로 ‘순국선열 이춘영의 묘’라고 음각되어 있고, 옥개석을 갖춘 묘비에는 “義兵將德水李公春永先生之墓 配孺人延安金氏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 墓碑文(묘비문)내용

公(공)의 諱(휘)는 (춘영), 字(자)는 友三(우삼), 號(호)는 愧隱(괴은)이요, 貫(관)은 德水(덕수)요, 始祖(시조)는 高麗(고려) 中郞將(중랑장) 諱敦守府君(휘돈수부군)이시다. 高麗朝(고려조)에서 六代(6대)를 顯達(현달)하시고 十七代祖(십칠대조) 諱揚(휘양) 號春塘(호춘당)께서 始朝鮮朝(시조선조) 工曹參議(공조참의)요, 十三代祖(13대조) 諱荇(휘행) 左義政兼(좌의정겸) 大提學(대제학) 諡文獻(시문헌) 號(호) 容齊(용제)요, 九代祖(9대조) 諱植(휘식) 吏曹判書兼(이조판서겸) 大提學(대제학) 諡文靖(시문정) 號(호) 澤堂(택당)이요, 六代祖(6대조) 諱箕鎭(휘기진) 吏曹判書(이조판서) 諡文憲(시문헌) 號(호) 牧谷(목곡)이요, 祖諱載信(조휘재신)께서는 名門(명문)의 后裔(후예)로 官(관)에 不就(불취)하시고, 아버지 諱敏和(휘민화)는 東部都事(동부도사)요, 어머니는 慶州崔氏(경주최씨)이며, 公(공)은 四千二百一年(4201년) 戊辰(무진)에 砥平鄕里(지평향리)에서 出生(출생)하시였다. 少時(소시)부터 聰明智慧(총명지혜)하며 學文(학문)에 篤實(독실)하여 度量(도량)과 氣槪(기개)가 뛰어나 不義(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天品(천품)이라 주위 사람들이 장차 크게 될 사람이라는 말을 하였다. 四千二百九年(4209년) 國運(국운)이 否塞(부새)하여 丙子修護條約(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니 鄕里(향리)에서 片母(편모)를 極盡(극진)히 모시였다. 名門(명문)의 后孫(후손)이라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으나 不義(불의)를 멀리하고 志操(지조)를 지키다. 交友(교우) 安承禹(안승우)와 뜻을 같이하여 救國準備運動(구국준비운동)에 착수하여 四千二百二十七年(4227년) 甲午更張(갑오경장)과 이듬해 乙未事變(을미사변)에 短髮令(단발령)이 公布(공포)되자 더참을 수 없어 四千二百二十八年(4228년) 砥平(지평) 楊東(양동) 原州(원주)에 同志(동지)들을 糾合(규합)하여 同年十一月 二十八日(동년 11월 28일) 原州郡地正面安昌里(원주군지정면안창리)에서 全國(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97-1

의병장(義兵將) 안승우(安承禹) 묘비(墓碑)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 74
󰁋 종류 : 묘, 묘비
󰁋 건립연대 : 1970년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19호

󰁋 내용

양동면 소재지에서 349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1.5km정도가면 석곡리 섬실 마을에 이르는데 여기에 양평의병묘역 입구표시가 있는 오른쪽으로 자동차 길을 따라 약 1km 정도 가면 양평의병묘역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 을미의병 추모비와 장군 묘, 독립유공자 묘역 등이 조성되어 있다.

안승우(安承禹, 1864~1896)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으로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본관은 순흥이다. 양동면 석곡리 출신으로 안종응(安鍾應)의 아들이다.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유중교가 죽은 뒤 그 유집 간행사업을 주도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동향인(同鄕人) 이춘영(李春永)과 함께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로 활약하였다. 충북 제천 싸움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준 뒤, 김백선(金百先)의 의병 400명과 합류, 그해 12월 영월로 들어가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휘하에서 중군이 되었다. 이듬해 충주를 함락하여 탐관오리들에게 의병부대의 위엄을 떨쳤으나 충주 황강(黃岡) 싸움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전사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묘 앞에는 1970년에 건립된 묘비(높이 117cm, 폭 41cm, 두께 17cm)가 있다. 묘비 앞면에는 “下沙順興安公承禹之墓”라 새겨져 있다.

󰁋 墓碣銘(묘갈명)비문내용

順興安公(순흥안공), 諱承禹(휘승우), 字啓賢(자계현), 護夏史(호하사)는 文成公(문성공) 諱裕(휘유)의 後孫(후손)이다. 顯祖(현조)로는 開城留守(개서유수) 諱援(휘원)이 있고 東塢(동오)諱光郁(휘광욱)翊贊公(익찬공)의 9世孫(세손)이다. 曾祖(증조)의 諱(휘)는 敬默(경묵)이요 祖(조)의 諱(휘)는 相玉(산옥)이요 考(고)의 諱(휘)는 鐘應(종응)이니 號(호)가 退央(퇴앙)인데 文章(문장)과 風誼(풍의)가 세상의 推重(추중)을 받았다. 비는 德水李氏(덕수이씨) 駿信(준신)의 女(여)이다. 高宗(고종) 乙丑年(을축년) 9월 9일에 公(공)이 태어나니 , 天賦(천부)가 우뚝하고 才質(재질)이 탁월하였다. 柳省齋(유성재)의 門人(문인)으로 본디 큰 뜻을 가지고 있어 항상 春秋(춘추)와 出師表(출사표)를 외웠다. 甲午(갑오) • 乙未年(을미년)의 변란을 당하여분발하여 일어나서 義兵의병)을 크게 모았다. 누차 싸워 여러번 승리하고 堤川(제천)에 의병을 주둔하고 있었는데, 奸賊(간적)이 倭(왜)에 붙어 상하가 變形(변형)을 하였고 또 主上(주상)을 협박하여 의병을 저지하게 하니 의병의 형세가 고단하여 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늠늠히 물러나지 않고 굳게 싸우면서 賊(적)을 꾸짖다가 끝내 해를 당하고 마니 사람들이 모두 울고 탄식하여 하던일을 멈추었다. 이때가 丙申年(병신년) 四月(4월) 十三日(13일)이니 나이가 三十二(32)였다. 주검을 거두어 堤川府(제천부)에 있는 華山(화산)의 酉坐原(유자원)에 장사지내니 本年(본년) 七月(7월) 十三(십삼)일이었다. 配位(배위)는 德水(덕수) 李敏永(이민영)의 女(여)이니 壬戌年(임술년)이며 己丑(기축) 十二月(12월) 二十四日(24일)에 卒(졸)하였다. 墓(묘)는 石室谷(석실곡) 寅坐(인좌)이다. 二男(2남)을 두니 基榮(기영)과 晦榮(회영)인데, 둘째는 叔父(숙부)에게 養子(양자)로 갔다. 德熙(洙龍)[덕희(수용)] • 鳳熙(봉희) • 喆熙(철희)는 큰아들의 소생이다. 載圭(재규)는 德熙(덕희)의 소생이요. 載弼(재필) • 載敦(재돈)은 鳳熙(봉희)의 소생이요. 載興 (재흥)은 喆熙(철희)의 소생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삼가 公(공)의 行狀(행장)을 상고하여 銘(명)한다.

文學(문학)은 바르고 확고하며

操履(조리)는 더욱 독실하였네

義兵(의병)을 크게 일으켜 누차 싸워 여러번 승리하였네

中華(중화)를 높이고오랑캐를 물리치며

邪敎(사교)를 막고 聖人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산74

의병장(義兵將) 김백선(金百先)묘비(墓砒)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산 114번지 
󰁋 종류 : 묘, 묘비
󰁋 건립연대 : 
󰁋 건립자 :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 호
󰁋 비문내용 

󰁋 내용

김백선의 묘는 갈운1리 마을의 동쪽 야산록에 위치한다. 정부인 파평 윤씨와의 합장묘이며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1992년 묘의 우측에 후손들이 두 개의 비를 건립하였다.

김백선(金百先, ?~1896)은 경기도 양평 출신의 항일의병장으로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이춘영, 안승우 등과 함께 지평에서 항일의병에 가담하였다. 유인석의 휘하에서 충주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충주성 함락 등 큰 공을 세웠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관리 

자가 관리하며 매년 10월 가족 및 의병사업회 임원 등 30여명이 시제를 봉행한다. 시제 비용은 매년 의병기념 사업회에서 50만원씩 지원한다.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산114

의병장(義兵將) 이승룡(李承龍) 묘비(墓碑)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산 95번지 백고개
󰁋 종류 : 묘, 묘비
󰁋 건립연대 : 
󰁋 건립자 :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 호
󰁋 비문내용

󰁋 略傳(약전)

이승룡의 묘는 용문면 삼성리 백고개 봉화뚝 해좌(亥坐)에 위치한다 公의 묘에는 1987년 손자 중신(重臣)이 묘비 등 석물(石物)을 갖추고 비문은 족보의 기록을 그대로 각자(刻字)하였다. 

이승룡(李承龍, 1853~1896)의 자는 수운(秀雲), 호는 금파(錦坡), 본관은 靑海(청해)이니 청해백 양렬공 이지란(靑海伯. 襄烈公 李之蘭)의 15대 손이다. 公(공)은 1853년 계축(癸丑) 정월(正月) 17일에 양근군 동종면 대곡동(양평읍 대흥리)에서 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가선대부동지중추사) 兼(겸) 五衛將(오위장) 殷錫(은석)과 모친 慶州(경주)崔氏(최씨)사이에서 출생하였다.

公(공)의 고조는 증통훈대부 사복시정인데 諱(휘)는 桄(광), 증조는 증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인데 諱(휘)는 慶若(경약), 조부는 증가선대부 병조참판인데 諱(휘)는 命逵(명규)이니, 3대의 증직은 은석의 관직에 의한 것이다. 충효를 가훈으로 하는 전통의 가문에서 태어난 公(공)은 어려서부터 英達(영달)하고 明敏(명민)하며 慷慨(강개)한 氣節(기절)이 있었다. 그리하여 公(공)은 독서를 좋아하여 10세에 四書三經(사서삼경)을 읽었다. 또한 武書(무서)도 읽히고 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장차 유망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1866년 14세 때 丙寅洋擾時(병인양요시)에는 나라가 위태로움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나가서 싸워야 한다며 벽에다 ‘의병장 이승룡’이라 써서 붙이고 서울로 올라갔다. 당시 친척 중에 혜랑벼술을 하는 李承穆(이승목)에게 찿아가서 “양평의 침입을 보고 백성으로서 어찌 가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가 싸우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李承穆(이승목)은 대원군에게 승룡의 기특함을 얘기하였다. 대원군은 “너아니라도 능히 양적을 물리칠터이니, 너는 고향에 내려가 학업을 열심히 닦고 군자의 도를 닦아 장차 훌륭한 일꾼이 되라”고 하여 그대로 내려왔다.

1877년 25세에는 친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하러 가는데 신변보호를 위하여 수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감사한 뜻으로 타고 가라며 당나귀에 한필과 아버님께드리라며 옷감 안동포 1필을 선사하여 당나귀에 싣고 문경새재를 넘어오는 도중 굼주려 쓰러진 한 가족 4명을 보고는 팔아서 쓰라며 당나귀를 그들에게 주고 걸어서 왔다.

그해에 武科(무과)에 급제하여 내직에 임명되어 다음 해에 副護軍(부호군)에 승지되었다. 1881년 29세에 忠北將(충북장)에 임명되어 복무하던중 다음 해 6월 9일 壬午軍亂(임오군란)이 일어나 민겸호가 살해되자 그 시신을 거두어 아들인 민영환 집으로 호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민영환과는 교분이 두터운 관계였다.

1885년 33세에 父親喪(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인 대곡동으로 내려와 3년 거상에 임하였다. 1887년 35세에 중추원 첨지를 거쳐 38세에 통정대부 康翎縣監(강령현감) 海州鎭管(해주진관) 兵馬節制都尉(병마절제도위)에 임명되었다. 이 때에 강령에는 탐관오리의 착취로 民擾(민요)가 발생하였는데, 민영환이 公(공)의 덕망과 지략을 잘 알고 고종에게 추천하여 임명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이 부임을 사양하였다. 고종이 어전으로 公(공)을 불러 사양 이유를 물은 즉 公(공)이 대답하기를 “황공하오나 백성들의 생활고가 막심한데다가 탐관오리의 착취와 헌납금 과징으로 민요가 일어났으니 통촉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고종은 즉석에서 헌납금 탕감을 윤허하시고 속히 부임하여 위민정치를 하라고 하였다. 公(공)은 강령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안유시키고 관속들의 민폐와 잡부금을 없애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890년 39세에 正月(정월) 이웃 고을 延安府(연안부)에 민요가 발생하자 황해감사 吳俊泳(오준영)이 나라에 장계를 올려 公(공)을 民擾收拾(민요수습) 明査官(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公(공)은5개군 수령과 난민의 대표를 불러 시시비비를 상세히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산95

의병장(義兵將) 이연년(李延秊) 묘비(墓碑)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산 95번지 백고개
󰁋 종류 : 묘, 묘비
󰁋 건립연대 : 
󰁋 건립자 :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 호
󰁋 약전(略傳)내용 

공(公)의 초명(初名)은 목연(穆秊)이고 호적명(戶籍名)은 득연(得秊)이며, 자는 경문(敬文) 호는 송석(松石), 본관은 청해이다. 1874년 갑술(甲戌) 12월 9일 양평읍 대흥리에서 강령현감(康翎縣監) (겸)兼 해주진영병마절제도위(海州鎭營兵馬節制都蔚) 이승룡(李承龍)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공(公)은 시조(始祖) 이지난(李之蘭)의 16대손인데, 조(祖)의 휘는 은석(殷錫), 증조의 휘(諱)는 명달(命達), 고조의 휘(諱)는 경고(慶苦)이다.

공(公)은 남천무과(南薦武科) 부사과(副詞果)에 임명되었다. 공(公)은 을미년에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거의하였던 부친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순국하자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1905년 일본은 창괴를 앞세워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국왕 이하 전민족이 울분을 참지못하였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공(公)은 부사과(副司果)를 사임하고 대흥리 본가로 귀향하여 34세에 의병을 일으켰다. 공(公)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의병을 규합하여, 양근 앞 남한강변에 의병을 매복시키고 또는 창말 근방 길목에 매복하여 양수리에 주둔한 수비대가 오는 것을 일시에 공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적의 응원을 염려하여 용문산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또 적이 용문산 방면으로 이동하는 것을 탐지하여 속칭 비고개산에 매복하였다가 고개로 오는 적을 습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용문산 깊숙이 이동하였다. 그러자 적은 용문산에 들어와 용문사를 불태웠다.

한편 여주에 일본군이 집결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항하여 의병도 여주방면에 집결하게 되었는데, 공(公)은 의병의 병기와 훈련미숙으로 정면대결 보다는 유격전을 주장하였다. 지평 양동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공(公)은 지원사격을 가하면서 후방으로 퇴각하였다. 여기서 일군은 여주방면으로 후퇴하였지만 의병의 희생은 컸다. 공의 병력은 홍천 횡성 등지로 이동하였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병을 가평으로 집결하라는 격문을 받고 가평 화악산 기슭에 유진하여 설빙혹한에 적과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공(公)은 사격을 계속 하였는데 총열이 달아서 총알이 앞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양측의 피해가 막심 하였는데, 공(公)은 복부에 냉해를 받아 배알이로 고생을 하였다.

1908년 홍천 횡성 지방에서 왜적과 10여 차례 격전 끝에 많은 병력손실을 보고 잔여병력 100여명을 이끌고 유격전을 계속하다가 청운면 삼성리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지평 감옥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7일만에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옥중 생활 8개월에 다시 완도의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공(公)이 유배중에 있는데 밤중에 찿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을 보고 의병장이냐고 묻고는 그렇다니까 우리는 의병이니 함께가자며 자기들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의병 수가 적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몇 사람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이 가난하고 애국심도 부족하여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귀국하여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서 5년간 머무르며 이극성(李克性) • 이무성(李武性) 등의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공(公)은 여주 가남면 대신리 대절(竹寺)마을로 이주하여 이희두(李喜斗) • 김창덕(金昌德) • 문선출(文善出) 등의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공(公)은 여기서 형집행 시효가 지나서야 다시 과천 문원리로 이주하여 4년이 지난 후에 양평 대흥리 본가로 돌아와 大谷書堂(대곡서덩)을 열어 他界(타계)할 때까지 10여년간 청소년을 훈학하며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켰다. 대흥리 李喜元(이휘원) • 李廣雨(이광우) • 金英烈(김영열) • 李秉寬(이병관) • 高大成(고대성, 생존) 등은 公(공)에게서 受學(수학)한 사람들이다.

公(공)은 1944년 4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삼성리 산95

의병장(義兵將) 김춘수(金春洙) 묘비(墓碑)

󰁋 소재지 :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자연리
󰁋 종류 : 묘, 묘비
󰁋 건립연대 :
󰁋 건립자 : 
󰁋 지정사항 : 양평군 향토유적 제 호
󰁋 略傳(약전)

公(공)의 字(자)는 春洙(춘수)이며, 일명 丙洙(병수)인데, 본관은 光山(광산)이니,興光(흥광)의 38세손이다. 1874년 甲戌(갑술) 8월 13일 옥천면 신복3리 292번지 福谷(복곡)에서 아버지 永錫(석(영석)과 어머니 固城李氏(고성이씨)와의 사이에서 長男(장남)으로 태어났다.

光山金氏(광산김씨)는 신라왕자 興光(흥광)에게서 유래한다. 興光(흥광)은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光州(광주)에 피신 은둔하여 살았는데, 대대로 그곳을 관향으로 삼은 것이다.

公(공)의 14대조 恭安公(공안공) 諱謙光(휘겸광)(1419 ~ 1490)은 純誠明亮佐理功臣(순성명량좌리공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관을 역임하고 光城君(광성군)에 피봉되었으며 淸白史(청백사)에 녹선되었다. 公(공)의 고조부 諱(휘)는 箕燁(기엽), 증조의 諱(휘)는 在貞(재정), 조부의 諱(휘)는 玉鉉(옥현)이다. 公(공)은 이도사라는 분에게 공부하였는데 성품이 과묵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호걸의 기상으로 자못 큰 일을 할 인물로 기대되었다.

민비시해와 단발령, 을사늑약 등으로 이어지는 친일 역당들과 일제의 만행이 계속되자 公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한 때는 개풍군수의 임명도 개화벼슬이라 사양하고 의리를 지켜 의병을 일으켰다.

公은 1907년 1월 李麟榮(이인영)이 서울을 공략하기 위한 十三道倡義大陣所(십삼도창의대진소)를 편제 할 때에는 安撫將(안무장)에 임명되고, 7월에 고종의 강제퇴위 사건, 정미 7조약,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재기할 때에는 34세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공(公)은 의병 800여 명을 모집하여 중군장에 한창리(韓昌履), 참모에 맹일호(孟日鎬)를 임명하고 홍천 보리울(牟谷), 여주 칠읍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때에 군량미는 원덕리에 천석군으로 이름난 이성연(李成淵 1886~1954)이 조달하였다. 한창리(韓昌履 1858~1918)는 자(字)가 성문(性文)인데, 같은 마을 용직(用直)의 아들이며 맹일호(孟日鎬)는 공(公)의 대고모부인 지평현감 맹영재(孟英在)의 아들이다.

7월에 진병산에서 패한 춘천의병장 류홍석(柳弘錫)의 잔여 병력을 인수 받아 항전하였고, 동년 8월에는 이성원(李成元), 김성관(金成寬) 등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양주군 광릉천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서울에서 귀향하는 임응서(林應西)를 포섭하여 양근․포천․가평․지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0월 초 1일에는 여주군 천양(川陽)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30명을 죽이고, 또 22일과 11월 15일경에는 홍천군 남창(南蒼)에서 일본군과 교전할 때 동갑(同甲)인 양평읍 대흥리 이연년(李延秊)을 종사(從事)로 임명하였다. 

公은 군진(軍陣)을 강상면 세월리 가제울, 여주 칠읍산, 옥천 남산에 포진시키고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일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였으나 일군에 역부족이었다. 公은 가평 남이섬에서 왜적의 칼을 맞고 쓰러져 체포되어 춘천 감옥에 구금되었다. 원래 힘이 장사인 公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을 하고 밤중에 죽을힘을 다하여 수갑을 끊고 버선발에 채워진 쇠줄을 빼내고 감시병을 때려 기절시킨 후 담을 뛰어 넘어 탈출하였다. 그러자 일경이 추격하였다. 公은 논두렁에 숨어 있다가 그곳을 빠져나와 어느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만주로 갔다. 그러나 만주에도 마적들이 한인을 괴롭혔기 때문에 다시 귀국하여 금강산 밑 회양(淮陽)으로 와서 9년간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公(공)이 탈출하자 고향인 옥천면 신복리 집에는 일경(日警)이 수시로 찿아와 공이 숨어있는 곳을 대라며 부인과 그 가족을 괴롭혔다. 그 괴롭힘에 견디다 못한 공(公)은 가족을 이끌고 여주군 개군면(介軍面) 공세리(貢稅里)로 이주하였다가 가평군 설악면 유명산하 깊숙한 산 골짜기인 설곡리 중말 688번지로 이주하였다. 공(公)은 여기서 문맹퇴치를 위하여 허술한 초가집에 일명 중말학교를 개설하고 한문(漢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