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의병 의의

1895 양평의병기념사업회

“의(義)로운 싸움은 
비록 지더라도 이기는 것이요, 
죽더라도 영광스러운 것이다.”

양평의병 활동(국맥지평의병) 이야기는 그저 단순한 의병이야기 가 아닙니다. 지평현 실곡의 퇴앙 안종응의 집에서 (현, 양동면 석곡부 락) 괴은 이춘영과 퇴앙 안종응(하사 안승우의 부친)이 을미사변(명성 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조선팔도가 들끓고 있었으나 의병을 일 으키지 못하고 있을 때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포군두령(포수. 사냥꾼)이었던 김백선과 같이 원주 안창역(당시 지평현 감 맹영재의 반대로 지평현 내에서의 거사가 여의치 않을듯하여 부득 이 원주 안창역 마을에서 의병을 일으킴)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 제 천 단양, 풍기, 순흥, 영월, 충주 등지에서 여러차례 관군과 일본군 수 비대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수안보 전투에서 괴은 이춘 영이 전사하고 가흥 전투의 패배 후 김백선의 처형, 그리고 제천 남산 전투에서 하사 안승우가 적의 포로가 되였다. 적의 칼날에 죽은 이후 로 의병의 기세가 크게 꺽이여 서북장정의 길로 접어들어 운산에서 손 용문 소년의병(당시 17세로 아버지 손덕화가 전사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병이 된 소년의병)의 긴급보고로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결국 만주의 서간도로 건너가기까지 고난의 발자취이었다.지평의병이 호좌의병으로 명칭이 바뀌고 이춘영 대장에서 의암 유인 석 대장으로 바뀌었으나 그 주력군은 지평의 포군이었다. 비록 지평의 병 창의 당시의 수뇌부(괴은 이춘영, 김백선, 하사 안승우)는 전사하고 의암 유인석(의암 유인석은 서종면 벽계에서 화서 이항노 선생에게 직 접 글을 배우고 화서 선생의 사상을 전수한 제자이다.)이 이끌었으나 양평의 정신을 이어 받은 분이셨다. 의암 유인석 선생이 서간도로 망 명하여 의병운동을 지도하고 후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도록 후진을 교 육 양성하여 대한 독립군이 되고, 그 독립군이 현재의 국군의 모태가 되었기에 국맥 지평의병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 민족은 역사 속에서 국가가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앉아서 보기 만 한것이 아니고 의병을 일으켜 적극적인 행동으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했던 좋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잠재 의식 속에서 꿈틀 거리는 의병정신이 있음에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그동안 양평의병(지평의병)이 제천, 원주, 충주의병 등으로 잘못 기술 되어왔기 때문에 우리 양평 의병기념 사업회에서는 그 의병 역사를 바 로 잡기 위해서 지평(양평)에서 일어난 사실을 밝혀 을미의병의 발상지 는 지평이라고 바로 잡기 위해 국맥지평의병이라는 책자를 국내 유명 역사학자를 선발하여 감수를 받아 발간하게 되었으며, 우리 학생들은 그 위대하고 장엄한 양평의병(지평의병)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 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이에 자라나는 우리 후배들이 양평(지평)의병정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배워서 자랑스러운 양평인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인사말을 하게 된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말 양평의병의 규모 등 분석

한말 양평의병의 규모 약1,800여명

을미의병(700명)
지평의진 : 의병장 이춘영·안승우·김백선이 창의를 주도 약400명
양근의병 : 의병장 이승룡이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감 약300명

을사~정미이후(1,100명)
의병장 권득수가 양평·양주·이천에서 200명
의병장 김춘수가 홍천에서 창의 200명
의병장 조인환이 양평에서 400명
의병장 최대평이 양평에서 300명